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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채호 선생의 말입니다. 삶을 성공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수백 년을 이어 온 지혜를 배우는 것. 그것은 나와 자손의 미래를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일은 바로 주변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구미 삼성 스마트시티는 이달부터 구미의 문화유산을 찾아 떠납니다.

 

 


 

구미시 봉곡동에는 효자들을 기리며 나라에서 내려준 ‘효열비각’이 있습니다. 한 채의 비각 안에 2기의 비와 3기의 현판이 있는데요. 한 집안 내의 한 효자와 두 열녀의 효행을 기리고 있습니다. 효자 박진환(1605∼1650)은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드릴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안타깝게 소용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3년간 시묘살이(3년 동안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를 하였다고 합니다. 바깥생활에 몸이 상한 박진환은 46세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요.

1681년(숙종 7년)에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현판을 내리고, 비를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세운 비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땅에 묻혔다가 그 윗부분만 발견되었고, 1974년에 새롭게 비를 세워 두 비를 함께 모셔놓았습니다.


 

착하고 어진 사람들의 효행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나 봅니다. 효자 박진환의 3대손과 8대손인 항령과 래은의 아내들은 모두 열녀로 이름을 알렸는데요. 박진환의 셋째 아들 손주 며느리 양주 조씨(1696∼1724)의 남편은 몸이 약하고 폐질환이 심해 항상 병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정성으로 간호한 남편이 34세에 세상을 떠나자 부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뒤따랐다고 하는데요.

박진환의 둘째 아들의 7세손 박내은 아내 함종 어씨(1778∼1811) 또한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뒷뜰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정려(효자·효부가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를 내렸습니다. 효열비각 안에는 이 두 열녀들을 기리는 편액도 함께 있는데요. 현재 효열비각은 2013년 조성된 밀양 박씨 경주부윤공파 재실인 봉곡재 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 봉곡동 효열비각(지방문화재자료 제391호)
위치 : 구미시 봉곡동 446(e편한세상 봉곡아파트 옆쪽, 봉곡재 내 위치)

 


 

야은 길재 선생(1353~1419). 고려후기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인 길재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구미에 낙향,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는데요. 그 덕에 성리학이 꽃필 수 있었습니다. 스마트시티는 길재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량동 일대를 밤실벽화마을로 조성하고 있는데요. 현재 총 3코스로 꾸며진 벽화마을 중 1코스 ‘야은 길재선생 이야기길’을 따라가다 보면 끝자락에 ‘야은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야은사는 1403년 당시 경상도관찰사이던 남재가 야은 길재의 집안 사당으로 건립한 것인데요. 퇴락한 건물을 1383년(선조 16년) 선산부사 유덕수가 수리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고, 순조 때 다시 수리한 이후 지금의 건물은 1972년에 다시 수리한 것입니다. 여러 차례의 부침을 겪었지만 아직도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습니다. 사당 안에 봉안된 초상화는 서양화가 박운보가 그린 것이며, 교지아 야은문집 판각본, 기타 문집 100여 권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야은사 바로 옆에 자리한 ‘충효당’은 원래 오태동 오산서원(吳山書院) 내에 있다가 1871년(고종 8년) 현 위치로 이건, 1948년에 중건된 것입니다. 오산서원은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길재의 묘 앞 나월봉(蘿月峰) 아래에 세운 사당으로, 충효당은 사당 앞에 지은 회당(會堂)이었습니다.

현재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충효당에는 숙종어제필의 판각과 이조판서 조상우와 선산부사 조두수의 어제운 등 목각판, 율리전원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곳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야은사와 충효당을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인데요. 길재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이 대나무는 ‘야은 죽’으로 불리며 길재 선생의 굳은 절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 야은사(冶隱祠), 충효당(忠孝堂)
위치 : 구미시 도량동 720(도량동 주민센터 골목 끝에 미광아파트가 있고, 그 왼쪽 산기슭에 있음)

 

 


 

금강사는 10년간 솔잎가루 생식과 묵언 수행을 하였다 해 묵언수좌로 알려진 철우선사(1895~1979)가 1952년 창건한 절입니다. 입구를 통과해 높이 쌓은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사찰의 경내로 이어지고 정면에 대웅전이 보이는데요. 이곳은 총 5개에 달하는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구미시 문화재 연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에는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 불상은 1701년(숙종 27년)에 제작되어 금강산 마하연의 법화원에 봉안된 것을 철우선사가 수행할 때 수습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요. 당시 철우선사는 ‘금동약사여래입상’, ‘금동관음보살입상’까지 금강산의 폐사지에서 함께 수습해 왔다고 합니다.

 


금동약사여래입상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시기 금동불로는 드물게 큰 작품에 속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귀중한 역사자료로 평가됩니다. 머리 위와 목과 가슴을 화려하게 장식한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오른손에 든 바구니 안에 물고기를 담고 있다는 것인데요. 옷 부분에 어자문(魚字文 : 물고기 알 모양의 둥근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는 이 불상은 10~11세기 고려시대 초기의 유물로 추정됩니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 다라니 3점과 조선시대 목판본 불경류 3책 등 6점의 소장 전적(典籍)과 당대 최고의 고승만이 입을 수 있다는 법의(法衣) ‘금란가사’도 소장하고 있는 금강사. 아쉽게도 현재 석조석가여래좌상을 제외한 나머지 문화재는 모처에 소장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문화재 : 금강사 석조석가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제338호), 금동약사여래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352호), 금동관음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제353호), 소장 전적(지방유형문화재 제354호), 금란가사(지방민속자료 제133호)
위치 : 구미시 원남로1길 69(구미역 바로 뒤)

 


참고문헌
<구미-선산 지역 문화의 복합성 구미문화재탐방> 전정중 지음, 한국학술정보
<구미·김천의 문화유적 알기> 김환대 엮음,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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