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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 선생 이야기④] – 성리학에 대하여

by 스마트시티

‘구미 삼행시’에서는 길재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이야기로 성리학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성리학과 성리학자로서의 길재 선생에 대해 알아봅니다.

 

사유와 실천의 근본, 성리학

성리학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하고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써 확립한 새로운 학풍으로 공자가 체계를 세우고 맹자가 크게 일으켰으며 주자가 집대성하였다.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고려 말기 원나라를 통해서였다. 이미 고려 중기부터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무신의 난 이후 유불일치의 사상 경향이 대두되면서 유학자들 역시 심성 수양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동향은 이 시기의 정치, 사회적 변동에 대응하여 새로운 방향에서 주체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안향, 성리학의 접하다

‘동방의 주자’라 불리는 안향. 그는 수차례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박사 김무정에게 공자를 비롯한 72현의 상(象)을 그려오게 하였다. 또 제기와 악기, 육경, 제자사 등의 책을 구입하는 등 성리학의 보급에 앞장섰다.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헌납하여 당시 국립대학격인 반궁(泮宮, 후에 성균관)을 신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안향은 세도가문의 권력남용, 관리의 부정부패, 양민수탈 등 고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인간이 따라야 할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한 성리학에서 길을 찾았던 것이다.

▲ 안향의 초상

고려의 성리학

성리학의 대표적 학자들은 고려 말에 등장한 신진사대부 계층으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이 있다. 이들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했다. 고려 말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고 불교계와 권문세가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색과 정몽주, 이숭인, 기재 등의 성리학자들은 기존의 고려 왕조를 보존하면서 권문세족만 척결하자는 온건개혁을 주장한다.

▲ 왼쪽부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조선의 성리학

정몽주의 학풍을 야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그리고 조광조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 왼쪽부터 이퇴계, 이율곡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와 이율곡이 태어났다. 퇴계는 성리란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의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율곡은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이었으나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을 위시한 제자의 학설과 양명학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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