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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와구미

자연 속, 배움의 길이 남아있는 구미 채미정

by 스마트시티

 

지난 1월, 새해를 맞아 구미 채미정에 다녀왔는데요. 물소리가 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듯합니다. 겨울의 초입에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물소리와 운율이 제법 잘 어울렸던 새해입니다. 금오산 기슭에 맑은 공기와 물은 정신을 맑게 만들어주었습니다.

 

 

1392년은 왕 씨의 나라에서 이 씨의 나라로 바뀌게 된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야은 길재(吉再)는 고려가 혼란해지고 쇠망해지는 시기인 1353년에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게 배우면서 학문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구미에 자리한 금오산 저수지에 채워진 물은 금오산에서 흘러내려와 채워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채워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채워진 물은 다시 흘러내려가듯이 배움도 그렇게 흘러내려갑니다. 

 

 

조금은 따뜻해진 날일까요. 야은 길재가 금오산에 머무른 것은 고려말 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금오산인(金烏山人)을 호로 사용할 만큼 금오산을 좋아했던 듯합니다. 그는 이미 우왕 때 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고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큰 물줄기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를 기리며 만들어둔 채미정으로 걸어서 올라가 봅니다. 새해 당시에는 좀 추웠지만 날은 좋았습니다. 선산과 금오산을 오갔을 야은 길재는 고려의 창왕 때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이곳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람이 태어나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은 없더라도 무언가가 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결국 야은 길재의 생각대로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이곳에 머무려는 생각을 합니다. 가진 것이 없이 내려왔으나 조선 왕조가 시작되고 선산 군수 정이오는 그에게 황무지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금오산 자락에 채미정은 아름다운 정자이며 고즈넉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정자이며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으나, 1977년 구미시에서 건물을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는 사업을 크게 시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서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채미정으로 들어가는 돌다리에 섰습니다. 야은 길재가 묻혀 살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의 거처나 삶이 자세히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태종이 될 이방원은 그를 한양으로 불러 태상박사의 벼슬을 맡으라고 하지만 그는 사양하고 묻혀 살길 밝혔다고 합니다. 이에 정종은 정신을 높게 사서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줄 뿐만이 아니라 제자를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채미정은 벽체가 없고 16개의 기둥만 있는 정자인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한식 건물로 한가운데 1칸을 방으로 만들고 ‘ㅁ’ 자로 우물마루를 두른 건물입니다. 겨울이어서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도 충분히 다리 아래로 흐르는 계류와 울창한 수목들은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이 차면 흘러넘치듯이 야은 길재의 정신은 차고 흘러넘치며 제자들에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금오산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성리학자이자 교육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채미정의 채미는 중국 주나라의 전설적인 형제 성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관한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저 서산에 올라 (登彼西山兮)

산중의 고사리나 꺾자 (采其薇矣)

포악함을 포악함으로 바꾸면서도 (以暴易暴兮)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不知其非矣)

 

신농과 우하의 시대는 가고 (神農虞夏 忽焉沒兮)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我安適歸矣)

아, 이제 떠나야 하리 (于嗟徂兮)

천명이 모두 쇠하였구나 (命之衰矣)

 

 

사마천의 사기에서 나온 채미가(采薇歌)의 내용입니다. 사람은 향기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야은은 올곧은 선비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그 길을 잘 지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곳에 묻혀 살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곳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걸려 있는 경모각(敬慕閣)과 구인재(求仁齋), 비각 등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야은 길재는 이곳을 등에 진 것은 1619년인데요.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꼈던 야은 길재는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것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지었다는 아도화상(阿道和尙)의 말처럼 황금빛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1419년 그의 나이는 67세였는데 임종을 앞두고 아들 길사순에게 자신은 그렇게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벼슬을 하라고 권유하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 기자단의 100% 순수 개인적인 견해로 작성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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