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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 선생 이야기①]‘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야은 길재

by 스마트시티

구미 삼성전자 스마트시티는 지난 1월부터 밤실마을과 벽화마을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밤실이 낳은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 ‘길재 선생’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있나요? 구미 삼행시에서는 구미를 대표하는 인물, 길재 선생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여러분에게 전하기 위해 ‘길재 선생 이야기’를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길재 선생과 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 후기로 돌아가 볼까요.


▲ 야은 길재(吉再) 1353년(공민왕 2) ~ 1419년(세종 1)

 

길재, 성리학을 만나다

길재 선생은 1353년(공민왕 2년), 경산도 선산부의 속현인 해평땅 봉계리(지금의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에 냉산 도리사(冷山 桃李寺)에 들어가 글공부를 시작했고, 18세에는 상산(商山-지금의 상주)에 사는 사록(司祿, 목이나 도호부의 행정책임자) 박분(朴賁)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우며 성리심학에 관한 학설을 듣게 된다.

▲ 도리사(桃李寺)

 

학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은 이색(李穡)과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특히 포은과의 만남은 장차 조선 성리학의 일대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양촌 권근(權近)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 목은 이색(李穡)(좌)과 정몽주(우)

 

학문 탐구와 후학 양성의 길을 걷다

길재 선생은 22세에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31세에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했다. 권근은 “내게 와서 학문을 배우는 사람이 많지만 길재가 독보(獨步)다”고 했으며 후일 선생으로 칭하기도 했다. 32세에 부친상으로 3년 상을 극진히 마친 길재 선생은 이후 송도의 용수산 동쪽에 거처를 마련해 모친을 모시면서 명현들과 교류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이방원과 한 마을에 살면서 성균관에서도 함께 공부하며 친분을 쌓았다. 1389년, 최고 정무기관인 문하부(門下府)의 정7품 종사랑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해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금주(지금의 금산)의 불이리에 살게 됐는데 이 후 해평 길씨의 단일씨족마을이 되었다.


▲ 성균관 대성전(좌), 명륜당(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길재 선생은 고려가 패망한 이래 조선왕조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노모를 모시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학생들과 경전(經傳)을 토론하고 성리(性理)의 강구에 힘썼다.

스승 권근, 박분 별세, 심상(心喪) 3년 상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교육과 경제적 안정을 찾은 후에 서재(書齋)를 열어 본격적인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서재에는 양반은 물론 미천한 자제에 이르기까지 하루 1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의 문하에는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金叔滋)가 있어 후일 길재의 학문이 김종직에게 전해줌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확립하게 되고 절의 정신은 이후 김일손, 김굉필, 정여립, 조광조, 조식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 삼강정려(봉계마을 출신의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

 

청렴결백한 삶을 살다

이방원은 길재에게 태상박사(太常博士) 벼슬에 임명해 관직에 나와 줄 것을 수차례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했다. 이 때문에 이방원은 늘 대신들에게 길재의 고결하고 청렴결백한 인품을 본받으라고 강조했다. 길재의 청렴결백함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져 오는데, 한 번은 이방원이 길재가 산골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백 섬을 보냈으나 길재는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길재의 명성은 이미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절의와 인품에 감복한 군수 이양(李揚)이 율곡동(현재 도량동 밤실마을 일대)에 전원을 주고 좋은 전답으로 바꾸어 주었으나 ‘무릇 물건이 아무리 풍족하다한들 그 종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기증 받은 전답을 그 가용에 준하여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 길재의 묘(구미시 오태동)

구미가 낳은 성리학자 길재 선생에 대해 이제 조금은 친근한 마음이 드시나요? 고려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야은 길재 선생. 그의 고고한 충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임을 각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길재 선생과 구미의 유적들’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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